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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가 악당을 쓰러뜨리려면 먼저 통장 잔고를 확인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처음 이 설정을 들었을 때 저는 피식 웃으면서도 "이거 진짜 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캐셔로'는 돈을 지불해야만 초능력이 발동되는 생계형 히어로의 이야기로, 설정만큼은 정말 역대급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끝까지 보고 나니, 소재가 가진 엄청난 잠재력과 실제 드라마의 완성도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화면 속 이준호 배우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저는 그저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리모컨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돈 쓰는 초능력, 설정의 잠재력은 왜 반감됐나
'캐셔로'의 핵심 설정은 한 마디로 '비용 지불형 능력 발동 시스템'입니다.
쉽게 말해 주인공이 자신의 현금을 소비해야만 자가 치유나 신체 강화 능력이 켜지는 구조입니다. 공무원 상웅이 아파트 마련을 위해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이 능력을 물려받는다는 설정은, 기존 히어로물의 문법을 완전히 뒤집는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서사적 아이러니(narrative irony)'라는 개념을 계속 떠올렸습니다. 서사적 아이러니란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우리가 기대하는 방향과 정반대로 작동하여 극적 긴장을 만들어내는 서사 장치를 의미합니다. 선을 행할수록 가난해지는 히어로라는 설정은 이 장치를 활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이었습니다.
실제로 어머니의 곗돈 3천만 원을 써서 버스 사고 현장의 시민들을 구하는 장면은 그 아이러니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순간이기도 했고, 솔직히 그 장면만큼은 꽤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와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제작진이 이 설정을 코미디와 현실 풍자가 뒤섞인 방식으로 좀 더 과감하게 밀어붙이기보다, 지나치게 따뜻한 감동 노선을 선택하면서 소재 본연의 에너지가 상당 부분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세계관 빌딩(world building)'이란 작품 내 규칙과 설정을 얼마나 일관되고 촘촘하게 구축하느냐를 가리키는 말인데, 캐셔로는 이 부분에서 특히 흔들렸습니다.
미나의 칼로리 소비 염력, 변호인의 음주 벽 통과 능력 같은 조연들의 설정은 분명 흥미로운 변주였지만, 그들의 서사가 후반부로 갈수록 힘을 잃고 흐릿해지면서 세계관 자체가 덜 만들어진 인상을 남겼습니다.
캐셔로가 가진 서사적 아쉬움을 3가지 포인트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병맛스러운 설정을 진지한 톤으로만 소화하면서 코미디와 장르적 쾌감을 동시에 놓침
- 조연들의 독특한 능력 조건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서사 후반부에서 그 존재가 희미해짐
- 선행에 따르는 경제적 손실이 시각화되는 방식이 반복되면서 오히려 시청자에게 답답함(고구마 전개)을 유발
국내 드라마 산업 통계를 보면, 2023년 이후 OTT 플랫폼 중심으로 히어로물 장르의 제작 편수가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입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이런 흐름 속에서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소재를 찾아낸 것 자체는 캐셔로의 분명한 성과입니다.
다만 소재를 발굴하는 능력과, 그 소재를 극 전체에서 일관된 리듬으로 구현해 내는 연출력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이 드라마를 보며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빌런이 약하면 히어로도 빛나지 않는다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답답했던 지점은 사실 빌런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주인공에게만 가혹한 제약이 걸려 있고, 정작 악역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초능력을 사용하는 구조였거든요.
이 불균형이 긴장감 있는 대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일방적으로 고통받는 핍박으로 느껴지게 만들었습니다.
히어로물에서 '빌런의 서사적 기능'은 단순히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 이상입니다.
훌륭한 빌런은 주인공의 가치관을 시험하고, 세계관의 논리를 완성시키며, 시청자가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촉매 역할을 합니다. 이를 드라마 비평에서는 '대립 구도의 내러티브 기능'이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빌런이 강하고 입체적일수록 히어로의 선택과 희생이 더 빛난다는 뜻입니다.
'무빙'과 비교하면 이 차이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무빙의 빌런들은 각자 자신만의 과거사와 명확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고, 주인공들의 삶을 뿌리째 흔들 만한 위협으로 존재했습니다. 저는 무빙을 보면서 빌런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긴장감에 등이 굳어지는 경험을 했는데, 캐셔로에서는 그런 '압도적인 위기감'을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특히 빌런 조직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갑자기 불거지며 갈등이 해소되는 결말부는 더욱 허탈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 납득할 만한 '극적 해소(dramatic resolution)'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를 빨리 끝내기 위해 빌런의 위협을 강제로 삭제한 처리처럼 느껴졌거든요.
이준호 배우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준호 배우의 팬으로서 이번 작품에 기대가 컸는데, 솔직히 그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배우 자체의 역량 문제가 아닙니다. 캐릭터의 내적 갈등이 표면적인 상황극 수준에 머물다 보니, 배우가 가진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충분히 끌어낼 기회 자체가 드라마 안에 부족했습니다.
웹툰 원작 드라마의 영상화 성공률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원작의 핵심 서사 구조와 캐릭터 간 긴장 관계를 얼마나 충실히 옮겨오느냐가 완성도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꼽힙니다(출처: 한국방송학회).
캐셔로는 웹툰이 가진 세계관의 독창성은 가져왔지만, 그 세계관을 팽팽하게 유지해줄 갈등의 밀도를 함께 가져오지 못한 안타까운 케이스로 보입니다.
총평 : 선한 의도와 아쉬운 그릇
캐셔로는 분명 선한 의도와 따뜻한 메시지를 가진 드라마입니다.
연말에 온 가족이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이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정말 재미있었다"는 감탄보다는 "참 아깝다"는 아쉬움이 먼저 나왔습니다.
소재만큼은 정말 A급이었고, 이준호라는 대체 불가능한 배우도 있었는데, 제작진의 연출이 좀 더 과감하게 장르적 긴장감을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빌런과 탄탄한 서사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무빙'을 먼저 보시는 것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그 후에 캐셔로를 시청하신다면, 제가 느꼈던 이 드라마의 가능성과 한계가 훨씬 더 선명하게 대비되어 보이실 겁니다.
저는 오늘도 웹툰 원작 기반의 새로운 히어로물을 검색하며, 언젠가는 '캐셔로'가 가졌던 참신한 설정이 100% 발휘된 '명작'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최고의 히어로물은 무엇인가요? 캐셔로의 설정 중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도 참 궁금해집니다.
참고: 캐셔로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