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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 편이 끝나고도 며칠째 그 감정이 가시지 않는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시죠? 저도 그랬습니다.
JTBC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를 다 보고 나서, 마지막 회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로맨스 드라마를 꽤 많이 봐온 편인데, 이 작품은 보는 내내 뭔가 다른 결의 감정을 건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며칠 동안 곱씹어 보았고, 이제 그 감상을 정리해 보려 합니다.
고도는 오지 않아도, 경도는 온다
사실 제가 이 드라마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제목 때문이었습니다.
문학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분이라면 바로 알아채셨겠지만, 이 제목은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모티브를 따온 겁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 문학(absurdist literature)의 대표작입니다. 부조리 문학이란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과 희망 없는 기다림을 전면에 내세우는 장르로, 베케트의 원작에서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허탈감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죠.
그런데 이 드라마는 거기서 정반대의 선언을 합니다. "고도는 기다려도 안 오지만, 경도는 온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이 한 문장이 드라마 전체의 감정적 방향타 역할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10년을 돌아 재회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가, 단순한 멜로를 넘어서 '기다림의 의미'라는 철학적 질문을 은근히 품고 있었습니다.
줄거리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연예부 기자 이경도(박서준 분)는 재벌가 사위와 여배우의 불륜·마약 스캔들을 취재하다가, 그 사건의 중심에 10년 전 첫사랑인 서지우(원지안 분)의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0년 만의 재회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고, 지우는 오히려 자신의 이혼 기사를 직접 써달라며 경도에게 단독 취재권을 제안합니다.
단독 취재권이란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독점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할 수 있는 권한을 뜻합니다.
언론 현장에서는 이 권한이 기자의 커리어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기회인데, 그 제안을 하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첫사랑이 들고 나타난 거죠. 이 설정 하나가 극의 긴장감을 처음부터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숨죽였던 부분도 바로 이 두 사람의 미묘한 직업적·감정적 밀당이었습니다.
왜 이 두 배우의 호흡이 유독 설득력 있었나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반신반의했습니다.
베테랑 박서준 배우와 신인 원지안 배우의 조합이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직접 보고 나서는 그 우려가 완전히 기우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두 배우의 합이 좋았던 건 단순히 "케미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핵심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non-verbal communication)의 밀도였습니다.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이나 글 대신 눈빛, 표정, 몸짓, 침묵 등으로 감정과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연기에서는 종종 대사보다 이 부분이 장면의 무게를 좌우하는데, 두 배우 모두 이게 각별히 뛰어났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굳이 말이 없어도, 10년이라는 공백과 그 안에 쌓인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박서준 배우 특유의 단단하고 안정적인 연기 톤이, 원지안 배우의 위태롭고 서늘한 감정선을 자연스럽게 받쳐주었습니다.
상반된 분위기가 오히려 두 인물이 묘하게 끌리는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했다고 느꼈습니다. 이건 제 경험상 쉽게 나오는 조합이 아닙니다.
조연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드라마에서 조연의 역할을 평가할 때 자주 쓰이는 기준이 앙상블(ensemble)입니다. 앙상블이란 개별 연기자가 아닌 출연진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단위로 움직이며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 드라마는 그 기준에서 확실히 합격점이었습니다.
지우의 언니 서지연 역의 이엘 배우, 경도의 동료 박세영 역의 이주영 배우, 친구 차우식 역의 강기둥 배우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극의 온도를 조절하며 구멍 없이 서사를 채웠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특히 조연들이 빛난 장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주인공들이 감정에 휩쓸릴 때 현실적인 시선으로 극의 균형을 잡아줌
- 주변인의 반응을 통해 두 주인공의 관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객관적으로 보여줌
- 무거운 서사 사이사이에서 극의 호흡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담당
대본의 힘이 받쳐줘야 연기도 산다
아무리 배우들이 잘해도, 대본이 받쳐주지 않으면 결국 한계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끝까지 몰입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캐릭터 서사(character arc)가 탄탄하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캐릭터 서사란 드라마 속 인물이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하는지를 그린 감정적 궤도를 말합니다.
지우는 단순히 '이혼녀'로 소비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집착과 원치 않는 전공 강요로 인해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아온 인물로, 그 상처가 현재의 행동과 말투에 구체적으로 배어 있었습니다.
경도 역시 10년 전 이별 이후 폐인처럼 지냈다는 과거가 단순한 설정으로 끝나지 않고, 지우를 앞에 두고 흔들리는 현재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습니다.
제가 시청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지점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10년의 세월을 사이에 두고 재회할 때, 서로에게 남은 감정이 단지 "아직도 좋아한다"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아직 아프다"는 층위까지 섞여 있다는 게 대사 하나하나에서 느껴졌습니다. 이런 감정의 복잡성을 대본이 잘 써주지 않으면 배우들이 아무리 잘해도 전달이 안 됩니다.
연출도 한몫했습니다.
임현욱 감독의 영상미는 전작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사계절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 상태를 반영하는 장치로 활용한 것이 특히 좋았습니다.
드라마 연출에서 이를 미장센(mise-en-scène)이라고 합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경, 조명, 의상, 인물의 위치 등을 통해 의미와 감정을 표현하는 연출 기법을 말합니다.
겨울 장면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톤이, 두 인물의 재회 직후 감정적 거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제 눈에는 꽤 세련되게 느껴졌습니다.
다만 후반부 전개에 대해서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렸고, 저도 그 부분에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입니다.
감정을 촘촘하게 쌓아온 만큼, 결말이 그 무게를 충분히 받아내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내 드라마 시청자들이 결말에 대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상은 통계로도 확인됩니다.
콘텐츠 소비 패턴 연구에 따르면 드라마 시청자의 72%가 결말 방식이 작품 전체 만족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국내 OTT 및 방송 드라마 시장은 2024년 기준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로맨스 장르는 여전히 핵심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출처: 방송통신위원회).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남는 건 이 드라마가 선사한 감정의 밀도입니다.
10년을 기다려 온 인연이 결국 어디로 가는지를 따라가는 과정 자체가, 다 보고 나서도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경도를 기다리며》가 궁금하신 분께는 1화부터 끝까지 정주행을 권합니다. 중간에 끊으면 답답합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습니다.
참고: 경도를 기다리며 하이라이트